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폭동 (문단 편집) === 상하이 시민정부 조직 === 북벌군의 입성에 저우언라이는 전투를 중지하고 국민혁명군을 환영하는 예비정부를 수립했다. 3월 22일 상하이 공상학 각계가 시민대표회의를 열고 시민대표 35명을 선출하였으며 바이충시, 유영건, 나역농, 왕숴화, 고순장 등 19명으로 상하이시 임시정부, 즉 상하이 시민정부가 조직되었다. 이 중에서 공산당원과 공청당원이 10명이었다. 공산당 절강 지구 위원회는 상하이 시민정부는 소비에트이며 [[파리 코뮌]]이라고 설명하는 등 적화 야욕을 보이고 있었다. 우한의 [[미하일 보로딘]]과 [[왕징웨이]] 정부는 신속히 상하이 시민정부를 승인하고 4개항을 결정했다. 1. 상하이 방면의 외교사무는 외교부장 천유런이 직접 담당한다. 1. 외교, 재정, 교통의 3부장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대응책을 지도하도록 한다. 1. [[쑨커]], [[구멍위]], [[천유런]], [[쑹쯔원]], [[쉬첸]] 등 5명을 파견하여 외교 연구회를 조직, 상하이 방면의 외교를 연구케 하고 천유런을 지도위원으로 한다. 1. 정치부 부주임 [[궈모뤄|곽말약]]을 상하이의 정치공작 지도원으로 파견한다. 시민정부의 구성을 공산당 측에서는 상하이의 노동자들이 북벌에 호응하여 군벌을 몰아내준 것 정도로 미화하였다. 그러나 정치적으로 분석해보면 공산당과 우한 정부가 상하이 지역의 정치적 주도권과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제스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